역시 이영도-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이영도

내가 이영도를 처음 만난 건 아마 중학교 때였을 거다. 그때는 한창 무협지에 푹 빠져있을 때였는데, 특히 와룡강을 좋아했다. 이유야 뭐 말 안 해도 다 알 테지만, 특히 질풍노도의 나이에 와룡강은 참 매력적인 작가였다(나중에 와룡강 스페셜을 한번 적어볼까 하는데, 검열삭제를 당할 거 같아서 고민 중이다). 하여튼 한창 무협지에 빠져 사는 와중에 우연히 서점에서 고른 책이 드래곤 라자였다.

당시 판타지라는 장르는 그리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었다. 유명했던 작품이 번역 작품인 마계마인전 정도. PC통신 쪽에서는 이런저런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출판 서적쪽에서는 그리 많은 작품이 나오지 않은 상황. 당연히 나도 판타지라는 장르를 잘 모르고 그저 희한한 제목의 소설이겠거니 하면서 1권을 구입했다.

왜, 어떻게 그 책을 골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건 1권을 구입해서 집으로 걸어오는 도중에 전부 다 읽어버리고 다시 뒤로 돌아 서점으로 뛰어가 나머지를 다 사 왔다는 거다. 5권까지 구입해서 한숨에 다 읽어버리고 아쉬워서 한숨만 쉬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이영도의 작품은 내 머릿속 판타지 1위로 남겨져 있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등등 전 작품을 다 읽어본 지금 그 생각은 더욱더 확고해진 상태고. 요새 조아라나 문피아 등 웹 소설 플랫폼에 나와있는 판타지 소설들을 읽어보면 이 생각은 더욱더 깊어진다. 제대로 된 글 솜씨랄까. 순수소설보다 더 확실히 순수소설 다운 판타지.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그리고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책이 바로 이영도 판타지 단편집이다.

(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중고로 구입한 책이라 책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6개의 단편 묶음집이다. 다 좋아하긴 하지만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름다운 전통. 문체 같은 게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제일 재미있어서다. 이영도 특유의 개그도 재미있고, 정말 짧아서-6페이지-머리 아플 때 간단하게 읽기도 좋다. 그리고 꽤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서도 좋고.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줄거리를 잡고 있는 글도 있을 정도니까.

아름다운 전통 말고 다른 단편들도 다 좋다. 오버 더 시리즈도 좋고 솔로쳐와 핸드레이크 시리즈도 좋고. 특히 솔로쳐와 핸드레이크 시리즈는 꽤 웃기다. 드래곤 라자에서의 모습이라면 꽤 근엄할 마법사들이 개그를 찍고 있는 걸 읽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읽었던 '마법사는 마법 이외의 것에선 전부 허당이다'라는 말이 꽤 근사하게 와닿을 정도.

더불어 문체나 주제도 좋다. 특유의 필력 덕분에 읽는데 지장이 없다. 요새 웹 소설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글 중에는 스토리는 좋은데 필력이나 문체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이영도는 그럴 염려가 없다. 술술 읽히면서도 읽고 나서 주제나 세계관이 머릿속에 한 번에 정리될 정도로 소위 '글빨'이 좋다.

하여튼 이영도의 다른 장편들은 읽기가 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이런 단편으로 시작하는 것도 상당히 좋을 것이다. 읽다가 흥미가 생기면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해도 좋고, 눈물을 마시는 새로 시작해도 좋고. 하여튼 판타지 소설에 흥미가 생긴 사람이나 요새 유행하는 웹 소설의 말도 안 되는 문체에 질린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 보는 것을 권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마무리가 꽤 독특하다. 읽어보면 알 테지만.